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나이 호 사건 (문단 편집) == 후폭풍과 수습 == 당연히 두 말 할 것도 없이 미국은 노발대발했다. 일본군은 아무런 항해 예고도 없었다고 항변했으나 미국은 일찌감치 '''주일 대사관을 통해 탈출함대의 항해일정을 정식 통보'''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들 함정은 명백히 성조기와 유니언잭을 게양한 채 항해 중이었고 주간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식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새벽의 포사격이야 안개로 인해 식별이 어려운 점을 인정하더라도 주간의 공습은 명백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의도적 공습이라고 미국은 판단한 것이다. 이미 사건 당일 미국은 파나이와 정기적으로 주고받는 통신이 이루어지지 않자 즉각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대응에 나섰으며 상해 일대를 담당하던 일본 해군 3함대에 연락장교를 파견하여 강력히 항의했다. 미국도 14일에 주미 일본 대사를 통해 강력히 항의하고 국무부에서 정식 항의성명을 발표했으며 미 해군 조사위원회가 파나이 호 격침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에 '''아직까진 미국과 전쟁할 생각이 없었던 일본'''은[*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결심하게 된 것은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럽 열강이 자신들의 세력확장에 태클을 걸지 못한다는 점이 충족되고 동시에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전략자원의 부족 상황 속에 Abcd 포위망에 의한 석유 금수조치가 단행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양국은 서로를 1920년대부터 가상적국으로 취급하긴 했지만.] 즉각 저자세로 나섰다. 사건 다음날인 13일에 3함대 사령관과 참모장이 미 아시아함대를 방문해 사과하였고 본국에서는 해군성 차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사과성명을 발표하며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일본 제국은 실비로 221만 4,007달러 36센트의 배상금을 1938년 4월에 지불하고 공격에 나선 항공대의 사령관을 경질시키며 미국을 무마하며 양국은 사건을 종식시켰다.[* 경질된 사령관은 나중에 더 좋은 자리로 영전했다. 즉, 미국 눈치보기용이었다는 것.] 미국도 당장 일본 제국과 전쟁을 벌일 마음도 없었고 그럴 여건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공황]]에서 이제 겨우 벗어날랑말랑 하며 회복을 시작하고 있었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묶여있던 해군력 증강도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이 정도 선에서 사건을 수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